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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성물기행

[性物紀行] 안양 삼성산 삼막사 남녀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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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三聖山)은 관악산(冠岳山)의 한 줄기로 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등 세 명의 성인(聖人)이 암자를 지어 정진했다하여 이름 지어진 산으로 삼막사(三幕寺)의 기원도 이때로 기인한다. 삼성산의 기원은 이렇듯 불교계의 삼성인에 의해 시작이 되었지만, 한국 카톨릭과도 인연이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명의 신부 성 앵베르, 성 모방, 성 샤스탕 등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기도 하니 현재 그들의 유해는 그곳에 없지만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불교와 천주교의 삼성인보다 먼저 성스러운 대접을 받은 바위가 이미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녀근석(男女根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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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의 남녀근석


삼막사의 남녀근석은 묘하게도 사람의 그것과 닮은 데다가 불과 2미터도 안 될 듯한 거리에 인접해 있어 일찍이 우리네 민중의 토속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두 기의 바위는 원효가 삼막사를 세우기 이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백성들의 기원들 들어주었는데, 바위를 만지면 순풍순풍 아이를 잘 낳는다고 하고, ‘가문의 영광’과 무병장수를 빌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의 나름 사람들의 소원을 잘 들어주었는지 명일이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니 아주 용한 바위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삼막사를 찾기 위해선 천안행 전철을 타야 했다. 안양이라는 위치가 선뜻 멀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전철을 타고 신도림을 지나서는 몇 정거장이 되지 않았다. 사전 조사에 의해 관악역에서 하차를 하였고, 관악산 방향의 표시가 있는 2번 출구로 나왔다. 역사 내의 다른 표지판엔 삼막사도 기재되어 있었다. 그냥 무작정 걸어도 될 것 같았으나, 지금껏 성물을 찾아다니면서 배운 것은 가능한 한 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뭐 건강을 위해 기행을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정확히 위치를 모르는 이상 어떻게든 헤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락산 남근석인 천하제일의 경우는 코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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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교육대학교


삼막사를 오르는 길은 경인교대와 인접해 있다. 찻길을 건너니 ‘석수1동 주민센터’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두 대 있다. 20번과 6-2번인데 모두 경인교대에서 종착을 한다. 버스로 가면 10분은 안 걸린 듯하다. 하지만 이 거리를 걸으려면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버스는 삼막사거리를 지나 안양해솔학교를 들러 경인교대로 간다.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여기서 끝, 이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로 입구에 공영유로주차장이 있으니 차를 가져온다면 주차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신자들을 위한 셔틀버스가 주차장 입구까지 몇 시간의 시차로 오르내리니 시간만 맞는다면 이를 이용해도 좋겠다. 애초부터 알았다면 필자도 그리했을 텐데, 애초에 알지도 못하고 그저 산행을 하는 이들의 뒤를 쫓아가기로 했다.

가을이 지나간 것인지 아직은 머문 것인지 모를 날씨는 춥지는 않았으나 산길에 들자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등산복장의 사람들이 ‘삼막사 등산로’라 적혀있는 우측 산길로 올랐다. 앞서 가는 아주머니들에게 포장로로도 삼막사를 갈 수 있냐니깐 그렇단다. 근데 왜 산길로 가냐니깐 포장도로는 구불구불하고 등산로는 한 시간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고 딱딱하지 않다고 한다. 어차피 오르막길이긴 마찬가지니 나도 빠른  길을 선택했다. 아, 왜 바위들은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일까? 매번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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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바위와 돌 투성이다.


그다지 가파르거나 암벽을 넘어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있는 산들은 죄다 바위산인지 온통 바위에 돌투성이라 발이 쉽게 피곤했다. 도중에 점퍼 안에서 훈훈한 공기가 넘쳐넘쳐 흘러나와 덥기까지 했다. 이미 내의는 땀에 젖었고 몇 겹 껴입은 탓에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결국 하나를 벗어버리고 멀리 풀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향해 산행을 재개했다.

마침내 등산로가 끝나고 삼막사 입구에 당도했다. 삼막사는 따로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내가 사찰 건축 양식에 잘 아는 것은 아니고 으레 산을 다니다 보면 들르게 되는 것이 절이고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문들이라 괜히 기대하게 되는 것이 단순한 내 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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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의 대웅전인 육관음전(六觀音殿)


우선 삼막사 경내를 훑어보았다. 대웅전과 부속건물이 바로바로 인접해있는 작은 절이었다. 크게 지으려 한다고 해도 산중턱에 있기에 넓게 짓기도 힘들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다 보다 높은 곳을 향하는 돌계단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물주전자를 들고 오르기에 따라 올라보았다. 나름 꽤 올랐다고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오르려니 엄한 곳에서 헤매게 되는 것은 아니까 하여 도로 내려와 우선 바위의 위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또다시 절 안을 서성이다 한 아저씨에게 물었다. 허허... 처음부터 물어볼 것을 결국 난 내려온 돌계단을 다시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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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코앞에 두고 내려왔다.


오르던 계단을 내려와 다시 오르려니 참 스스로가 한심했다. 계단을 얼마나 올랐을까, 칠성각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오르자 칠성각이 있는 평지 바로 입구에 튼실하고 낯익은 여근석이 보였다. 옳거니, 이 바위는 전에도 본 일이 있으렸다. 그것은 바로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의 장승동산에 있는 남녀근석 중 여근석이 이 삼막사의 여근석을 본뜬 것이었다. 결국 그 오리지널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헌데 볼수록 참으로 묘하다. 어찌 자연석이 여인의 둔부와 음부, 항문을 이렇게 쏙 빼다 박았을까. 게다가 일부러 글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바위의 음부에는 축축하게 물이 고여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기원의 의미를 담은 동전이 몇 개 박혀있다. 괜한 마음에 손을 합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슬그머니 동전을 하나 넣어보았다. 금방 냉장고에서 꺼낸 물처럼 차가왔다. 다른 곳은 말랐는데 어찌 그곳만이 물이 고여 있으며, 또 흘러넘친 흔적까지 있는 것일까. 이것은 계단을 오르던 아주머니들의 물주전자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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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의 여근석, 경복궁 여근석의 오리지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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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하고 있는 듯한 여인의 하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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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에는 기원의 동전이 넣어져 있다.


여근석의 끝으로 서있는 난간을 따라 가보면 그 바깥으로 바위가 하나 서있다. 여근석의 짝인 남근석이다. 하지만 남근석은 남근 같지 않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저 대충 아무렇게나 서있는 바위다. 하지만 시선의 방향을 돌려 보면 비로소 남근의 모양이 된다. 물론 여태의 출중한 남근석에 비하면 역시 부족한 모습이기는 하다. 그래도 대략 귀두의 모양이나 요도의 갈라짐이 눈에 보인다. 더욱이 아주 훌륭한 짝인 여근석을 곁에 두고 있지 않은가? 모양은 대충 그래도 자리만은 최고인 남근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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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봐야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이 남근석에도 기원의 흔적은 남겨져 있었다. 여근석과 마찬가지로 그 표현은 동전으로 이루어졌다. 바위릐 우툴두툴한 표면에 동전을 문질러 붙인다. 말이 붙어 있는 것이고, 경사와 절묘하게 동전의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바위 표면의 돌기가 떨어지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소나기라도 두둑하게 내려 또 절묘하게 동전의 윗부분이라도 맞춘다면 금방 떨어질지도 모른다. 사실 거기까지야 생각해볼 게 무어 있겠는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남근석에 붙여놓았다. 어떤 기원을 담기보다는 그저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아주 작은 의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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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들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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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전마다 기원이 담겨있을 것이다.


삼막사의 칠성각은 남녀근석보다 한참이나 뒤에 생겼을 것이다. 칠성각이 모시고 있는 마애삼존불은 조선 영조 39년에 암벽에 새겨졌는데 이때가 1763년이니 삼막사가 세워진 677년부터 따진다고 해도 1000년여 세월이나 뒤쳐져 있다. 남녀근석은 삼막사보다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수천의 세월을 그렇게 둘이 보냈을 수도 있겠다. 마치 두 남녀근석이 칠성각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입구에 버티고 있지만, 그 둘은 석가 이전부터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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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수천년을 서로 이렇게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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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예 쪽 매스컴에서는 10여년을 같이 산 연예인 부부의 간통과 이혼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또 자살한 한 여배우의 전남편의 양육권을 둘러싼 논쟁도 아직 진행 중이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유행어를 낳게 한 거의 컬트적인 드라마도 있다. 많이 엉뚱한 상상이지만 이들을 비롯해서 이별과 파국을 생각하는 많은 부부나 연인들이 혹시라도 이 바위를 알게 되어 수 천 년을 같은 자리에서 이렇게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꼭 이렇게 살라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면 바위를 한 번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문득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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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명왕전(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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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있는 부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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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의 승도 김윤후가 몽고군 대장 살이타이를 죽여,
그 승적을 기념한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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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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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천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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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백련암지에 은거할 때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세 개의 거북귀(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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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마애삼존불이 있는 칠보전(칠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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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마애삼존불과 기도하는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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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의 백구







* 본 포스트는 연애통신(www.yonae.com)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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