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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친친국수

나는 국수 장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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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걸 언제부터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최초의 바람은 법관이었다. 근데 그건 백프로 아버지의 희망이었고, 법관이 뭘 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검사니 판사니 변호사니 법대니 하는 개념들이 머리에 윤곽이 잡히니깐 내가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를 해야하는가. 

그러다가 정한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문학과를 들어갔고 문학을 공부했다. 근데 시란 게 공부한다고 써지는 것도 아니고 시인이란 또 얼마나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가를 인식할 무렵 현실적인 밥벌이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자리잡은 것이 대학교재 출판사였다. 

책을 만드는 일은 그럭저럭 적성에 맞았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 겨울이면 히터가 훈훈하게 들어오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일은 썩 괜찮은 일이었다. 급여가 아쉬었지만 뭐 죽어라 취업공부를 한 일도 없으니 내게 괜찮은 직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업부 발령이 났다. 평소 술자리에서 주는 술 마다않고 마셔대던 주력을 능력으로 인정한 회사의 인사였다. 거절할 도리없는 나로선 그 이후로 3년 정도를 교재영업을 다녔다. 서울, 인천, 경기, 충북의 각 도시를 다니며 운전도 늘고 한산한 지방 거리를 다니는 것도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이었다. 실적에 대한 압박과 가끔 졸음운전으로 인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또한 그럭저럭 할 만 했다.

그러다 시골엘 내려갔다. 아버지께서 오리나 식용 기러기를 키우셨는데 건강이 안좋아져 입원까지 하게 된 일이 생겼던 것이다. 해서 실적부담과 객사의 위험에서 벗어나고도 싶었고, 아버지 곁에서 짐승을 키우는 일도 괜찮겠다 싶어 직장을 정리하고 시골 산골로 자리를 옮겼다.

동물을 키우는 일은 적성에 맞았다. 밥 때만 되면 알아보고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들이 기특했고, 그래도 부모님이랑 함께 있으니 맘이 편했다. 근데 벌이가 시원찮았다. 아니 점점 벌어놓은 돈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시내로 건설 회사 사무를 보는 알바를 다녔다. 미래는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당시 난 농장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이게 나름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 사이에선 인기가 있었나보다. 한 선배가 이를 카페에 옮겨 공유를 했는데 거기서 본 한 인터넷매체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꽤 이름난 매체였는데, 월급을 주고 채용을 한다니 냉큼 다시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뭐 돈도 벌여야 하고 장가도 가야 하고 하니 부모님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인터넷에서 글을 쓰고 사진도 찍고 해서 먹고 살았다. 이름난 작가나 기자로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에는 할 만 했다. 업무로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비행기 타고 해외도 나다니고 했으니 별다른 노력없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 무렵 하던 일이 맛집을 취재 다니는 것이었다. 본래의 소관은 아니었는데 시작한 이가 그만 두는 바람에 업무를 어쩔 수 없이 넘겨받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내 기억인데 정확하지는 않다. 암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정보를 찾아가며 이집저집 음식점을 기웃거렸다. 사실 입이 싸서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편인데, 이게 또 글로 써야 하니 평아닌 평을 해야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주제넘은 짓이었다.

인터넷 매체에서 블로그 사이트로 또 잡지사에서 여행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내 일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콘텐츠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발행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다니던 여행사가 망했다. 아니 망하기 바로 직전 쫒겨났다. 한동안 아는 사람의 소개로 사보에 사진도 찍고 관보에 글도 쓰고 했지만 크게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못받은 돈도 있다. 그러다 다시 어찌하다보니 다시 교재 출판을 하게 되었다.

이전 일보다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지만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나다닐 일도 없고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를 치고 마우스를 잡아끄는 일은 아주 익숙한 일이고,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 별 걱정은 없었다. 근데 그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지... 한 오년 근무했으니 나름 오래 한 것인가?

출판 시장은 이미 오래 전에 포화상태이고 레드오션이었다. 새로운 아이템과 기술, 정보로 시장을 이끌고 하는 혁신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로선 그걸 쫓기에도 능력이나 의지도 부족한 현실이었다. 여튼, 날로 해를 거듭하면서 시장과 회사 사정은 안좋아졌고, 급기야 회사를 나와야 했다.

40을 훌쩍 넘은 남자가 아무 일이 없이 세상을 살기는 참 힘들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고 잠시라도 쉬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 하루하루 매달 들어가는 고정비와 생활비 등 경제적인 부담이 가장 큰 일이다. 나야 자식도 없이 2인 가족으로 사는 사람이라 다른 가정에 비하면 부담이 덜하겠지만, 혼자라고 한들 아무런 수입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빨리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내겐 재주 같지도 않은 재주가 있었다. 음식을 하면 사람이 먹을 만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 하지는 않지만 입 짧은 마누라도 먹게하는 능력을 가졌다. 실패한 음식도 더러는 있지만, 성공적인 수치가 더 많으니깐 재주라면 재주다.

그리하여 시작한 것이 국수 장사다. 지난 12월 말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 계획을 세우고, 친구를 만나고, 업소를 알아보고, 계악을 하고, 공사를 하고, 식기 및 설비를 사고... 드디어 4월 15일 첫장사를 했다. 설레고 두려웠던 그 첫날이 지나고 하루하루 힘들게 문을 열다보니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한 번 왔던 손님이 다시 오고, 외국인 단골이 생기고, 국수 하루 판매가 열 그릇에서 스무 그릇, 사십 그릇으로 늘어나고 있다. 성공은 아직 멀었고 여전히 두렵고 힘들다. 그저 오늘 이것 하나만 말하자면, 그동안 여러 가지 이름의 직함을 달고 살아왔다. 미스터, 과장, 차장, 실장, 팀장, 기자, 작가... 사실 별로 내겐 별로 어울리지는 않은 허울좋은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국수 장수는 어울리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직은 어색하고 어렵다. 뭐 먹고 살자고 갑자기 저지르게 된 일이니까. 근데 누군가 '지금 뭐 해요?' 라고 묻는다면 또 나는 뭐라 하겠는가? 고로...

나는 국수 장수다. 그리고 이제부터 국수 장수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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