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이었을 거다. 설명하자면 좀 늘어지지만 어쨌건 난 한 과를 대표하는 학생회장이었고, 당시는 학내 민주화의 기치가 하늘까지는 아니고 적어도 우리 학교 본관 천정은 뚫을 듯했다. 그렇다고 천정을 뚫을 수는 없으니, 학생회관에 있는 학생처를 점거하거나, 본관에 있는 총장실을 점거하거나 기어코는 이사장 공관마저도 점거해버리는 등의 시리즈 점거농성으로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외치고 다녔드랬다. 사실 나야 운동권이라기엔 사상이 한참 부족하고 앞서 말했듯이 '어쨌건'으로 학생회장 자리를 짊어지고 있던 유약한 자라, 이 암울한 시절이 언제 내 인생에서 빨리 지나갈려나... 하는 해도 소용없는 고민을 머리 한 켠에 숨겨두고, 구호 하나 제대로 앞서 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의 상황은 점점 우리에게 불리해져가고 있었다. 애초의 답변 외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학교측의 태도와 장기전으로 들어간 탓에 학우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급기야 학생회장단의 수업거부, 단식투쟁, 혈서... 등이 있었다. 결정적인 삭발...은 학생회장단 대표급이었던 선배 하나만 하기로 하고... 정말 하기 싫었지만 했다. 누가 비싼 돈 내가면서 다니는 학교 수업을 공식적으로 빼먹고, 누가  밥까지 굶어가며 구호를 외치고, 일부러 손가락을 째서 피까지 흘리고, 애써 가꾼 생머리를 민대머리로 만들고 싶겠는가. 어쨌건 학생회장단은 누구를 대표하던 간에 뭔가를 보여줘야 했었고, 그러기엔 위의 것들이 아주 전시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그들은 며칠을 쫄쫄 굶고 있었다.

공대 앞 계단에 천막을 쳐놓고, 요구사항을 적어놓은 자보와 플랭카드, 피켓 등으로 주위를 장식하고는, 학생회장들은 물과 소금만으로 연명하며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구호를 휑한 허공에 외치고 있었다.  2,3일이 지났는지 4,5일이 지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미 뱃속의 허기는 잊은 지 오래였다. 민중가요와 구호를 번갈아 외치고 잠깐 쉬기도 하고 그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동기 여학생이 나타났다.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내가 그녀에게로 갔는지 그녀가 내게로 왔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녀는 내게 작은 뭔가를 주머니에 넣어주고는, '몰래 먹어...'라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살짝 손을 흔들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아... 가슴팍에서 뭔지 모를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난 그동안 과 학우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학생은 우리 과에서 나름 인기가 있던 아이였다. 게다가 다른 단과대학에서도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던 아이였다. 한때 과에서 누구랑 사귀기도 했었고, 헤어지기도 했다는데, 뭐 나랑은 아무런 뭔가가 없었다. 호감이야 있었지만 그저 단순한 이성에 대한 호감이었고, 그때 난 다른 누군가를 좋아했던지 어쨌는지 그 아이에겐 어떤 말로나 행동도 취하지는 않았었다. 어쨌든...

그녀가 내게 주고 간 것은 노랗고 작은 레모나 한 개였다. 난 그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것 같고, 그런데 그걸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은 없다. 이미 20여년 전의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난 레모나를 비롯한 노란 비타민 C 가루를 보면 그때의 그녀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때 그 아이에게 인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고마움도 아직 남아있다. 그래서 여전히 고맙다.

그 이후로 그녀를 기억하는 모습은 제대로 없다. 물론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난 이듬해 군대를 갔고 그녀는 그 이듬해 졸업을 했다. 이후로는 영 볼 수가 없었다. 가끔 그녀를 좋아했던 녀석에게서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래 봤자 같은 얘기만 반복될 뿐이지만. 누구랑 사귀었었다는 것, 졸업후 얼마 안지나 결혼을 했다는 것, 남자가 별로였다는 것, 이미 아줌마가 다 되었다는 것 등... 말이다.

근데 그녀가 누구랑 사귀었든, 결혼을 했든, 아줌마가 되었든 내겐 상관이 없는 것이,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비타민C의 맛처럼 새콤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녀를 다시 보는 일이 있을지, 그래서 이 오래된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교롭게도 레모나 아래에 있는 키보드 자판의 GHJ는 그녀의 이니셜이 된다.
HJK 역시 영어식 이름의 이니셜이 된다.





'맛있는 이야기 > 기억을 먹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생의 감자탕, 혹은 감자국...  (2) 2010.08.01
비빔이냐 물이냐...  (2) 2010.06.29
새콤한 비타민 C의 기억...  (7) 2010.06.05
쏘세지는 맛있어~ 2  (4) 2010.03.07
소시지는 맛있어~!  (2) 2010.02.21
어머니의 청국장  (2) 2010.01.09
Posted by 미동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0.06.13 17:1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지난 수요일 그녀를 좋아했던 두 녀석과 그녀를 기억하는 한 녀석을 만나 술을 마셨다. 술은 많이 마셨는데 그녀 때문은 아니었다. 웃기는 건 이제 너무 오래 지난 얘기였는지 녀석들은 그랬었나... 하고 기억을 흐트리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때는 소중했던 감정이었을 건데, 시간은, 세월이란 너무나 냉정하고 메마른 친구인 것 같다.
  2. 임지
    2010.06.24 15:4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전 레모나 보면..주근깨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뿐ㅋㅋㅋㅋ
    • 2010.06.26 13:2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나도 한때 깨가 좀 있었다는... 근데 그게 여드름 덕에 많이 사라졌다는... ^^;
  3. 2010.06.24 15:4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 2010.06.26 13:2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항복! ^^;;;
  4. 2010.07.30 08:0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미동성..... 누군지 추적해봐야 겠어요 ^_^
    • 2010.07.31 21:4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제사 뭘... 추적한다고 뭘... ^^;;;;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4)
여행이야기 (98)
맛있는 이야기 (61)
Article (7)
영화이야기 (9)
그리고 못다한 이야기 (9)
어쩐지 인연이 짧다 (0)
사진으로 말하기 (14)
원미동이 만난 사람들 (11)
스타포토 (173)
레이싱모델 (17)
음악다방 (25)
원미동박물관 (6)
이러고산다 (14)

패션벨트-어머샵
무료배송/남녀캐쥬얼벨트/가죽벨트/정장벨트/메쉬/에나멜/벨트/나토벨트시계
OMOSHOP

 

공지사항

Statistics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