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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기억을 먹는다

어머니의 청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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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성탄연휴 시골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청국장.
어느집의 청국장이 이보다 맛이 좋을까.

본래 청국장이 충청도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릴 때부터 청국장을 많이 먹고 자랐다. 오히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보다 더 익숙한 음식이 청국장찌개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먹는 일은 별로 없었다. 된장국이거나 김치국이지 찌개를 먹는 일은 청국장보다 적었던 것 같다. 아무튼 청국장은 내겐 참 친숙한 음식이다.

그런데 이 친숙한 청국장을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내려간 뒤로는 자주 먹지 못하는 그리운 음식이 되어 버렸다. 물론 식당에서 사먹으면 그만이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세상 어떤 음식이 어머니의 손맛을 따라 가겠는가. 먹을 만한 청국장집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실 어머니의 청국장은 별게 없다. 신김치와 두부, 그리고 뭐 양파든지 파든지 하는 야채와 다진 마늘 같은 양념이 다다. 그런데도 그 청국장이 제일로 맛이 좋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이미 수십년을 익어온 입맛 탓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형제들이 시골집을 찾을 때면 시도때도 없이 어머니께 청국장을 주문하곤 한다.

청국장으로 인해 어머니께 미안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고 어줍잖은 마케팅 회사를 다니다 2주만에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찾을 무렵이었나보다. 피씨통신으로 검색해서 사원모집을 하는 곳이라면 아무 데고 이력서나 디밀어 볼 뿐, 딱히 어디고 나가서 일자리를 알아볼 주변머리도 없었던 나는 술이나 먹자는 친구마저 없으면 하루종일 방구석이나 지키는 건달까지는 못되는 백수였다. 멀쩡하게 대학 졸업해서(따져보면 그다지 멀쩡하게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빈둥거리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굶길 수는 없으니, 어머닌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점심 때였나. 매일 먹는 반찬에 청국장이 나왔다. 지금이야 자주 못먹으니 그리운 음식이지만, 그때야 뻑하면 먹는 찌개가 청국장인지라 별다른 생각이나 입맛이 있겠는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이 수저를 들었다. 청국장을 덜 끓였던지 새로 신김치를 넣었든지 아무튼 김치의 시큼한 맛이 가시지 않는 찌개는 맛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청국장에 김치가 들어가는지 깍두기가 들어가는지 별 관심도 두지 않았던 때라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좀 맛이 떨어진 청국장 찌개를 먹고는 괜한 반찬투정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입에서 나온 말이,

"청국장에 왜 신김치를 넣었어! 맛없잖아요!"

나의 이 갑작스런 투정 겸 비난이 어머니의 심사를 건드렸었나보다. 어머니 역시

"이눔아 청국장엔 원래 신김치가 들어가는 거여!"

하고 큰 소리를 친 후 등을 돌리셨다. 그뒤로 난 꾸역꾸역 밥을 먹었고, 어머닌 한 마디도 안하셨다. 상을 물린 후도 어머니와 난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미안한 시간만 괘종시계의 초침소리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난 친구가 불러서인지 아님 그냥 그 민망한 시간 속에서 집에 있기가 불편해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을 나섰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 술을 마셨다. 희한한 게 사내들이란 돈이 없어도 술은 먹고 다니고 담배는 피워댄다. 나 또한 그런 남자였던지 그날 저녁은 술과 담배와 너저분한 음담패설과 되도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죽여댔을 것이다. 그렇게 청국장과 어머니에 대한 무례와 불편한 심정을 잊어먹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술마시는 사내들이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도 집으로 잘 기어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다음날이면 까마득하게 전날의 귀가길을 잊어버린다는 것.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전날의 귀가길과 술자리에서 떠들어댄 얘기거리만 기억을 못 할뿐이었다.

그렇게 그날 청국장과 어머니에 대한 일은 아무런 후사 없이 지나갔고, 아직도 난 어머니께 그날의 무례를 사과하지 못했다. 물론 가족끼리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고, 그 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먹고는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미안한 기억이다. 이제사 어머니께 그날의 일을 사과드린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니? 하고 어머니 생소하다는 듯이 말씀을 하실 것이 '분명'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에 가깝다. 또 나도 사과를 하든 그냥 묻고 넘어가든 앞으로의 인생에 작게라도 변화나 뭔가가 없을 일이다.

다만 어머니의 청국장은 여전히 나에겐 맛있지만 미안한 음식이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미안한 음식을 어머니께 주문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기회는 시간이 흘러 갈수록 줄어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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