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부근 국수집의 잔치국수. 시원하고 깔끔한 맛과 푸짐한 양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내가 그리는 맛은 이와는 다르다.
난 잔치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딱히 좋아한다 싫어한다를 얘기하기 전에, 뭘 먹나... 고민 할 때면 생각 외의 메뉴이기에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저 길을 지나다 눈에 띄어 동행인이 먹자고 하거나, 포장마차에 들렀을 때 괜히 출출한 배를 채운다면 시켜먹을 뿐인 메뉴다. 또 비빔국수냐 잔치국수냐를 선택한다면 난 국물이 있는 잔치국수를 선호할 뿐이다.
그런 잔치국수가 아주 맛있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형의 결혼식날이었는데, 시내에서 예식을 했지만, 식장에는 오지 못한 동네 이웃들 대접한다고 집에서 국수를 준비했었다. 그야말로 잔치국수인 셈이었다. 소고기를 푹 우려내어 살코기를 발라 찢어놓고, 그 고기와 계란 지단과 함께 김가루 등을 고명으로 얹어 오가는 동네 어르신께 대접을 했었다. 나야 형의 결혼식이니 어디에 앉아 놀고 있을 짬밥은 되지 못했다. 간간이 국수를 나르거나 사촌들과 마당에서 지난 얘기나 하면서 담배나 피고 있었다.
그러다 은근히 출출함을 느꼈다. 부엌엘 가보니 국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이었지만, 그래도 내 식구 잔치인데 맛도 못볼까싶어 어머니께 하나 말아달라 했다. 약간은 허기가 진 상태였던지라 훌훌 잘도 넘어갔다. 진한 소고기 육수 안에 풀어진 하얀 소면은 씹는 둥 마는 둥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고기육수의 감칠맛은 포장마차에서 먹던 멸치육수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아, 이래서 잔치엔 고기가 필요하구나. 멸치육수의 시원함도 좋지만 비로소 내 입맛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아버진 장남의 많이 늦은 결혼식을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먼저 결혼한 내 결혼식보다는 더 좋아하신 것 같았다. 동생을 먼저 보내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난 후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서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내 결혼식 때는 내가 주인공이니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거나 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지나갔으니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형도 본인의 결혼식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형의 결혼으로 먼저 장가든 동생으로서의 심적인 부담을 덜었다. 즐거워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는 나도 즐겁고 좋았다.
아버진 불행하게도 형의 결혼식 몇년 뒤에 폐암에 걸리셨다. 수십년을 소위 말하는 입담배를 피우셨는데, 그게 원인이었는지 발견할 당시엔 이미 말기였다. 온가족이 충격이었다. 아무리 흔한 사망원인이 암이라지만 그게 우리 가족에게 닥칠 줄은 아무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충격은 충격이고 사람은 계속 살아야 했다. 아버진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몸은 날로 수척해갔다. 거의 매주 아버지를 찾았다. 어쩌다 치료를 마치고 집에서 쉬시는 날이거나 급한 용무가 있거나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았다.
가끔 희망의 빛이 보이기도 했다. 중간 중간 검사 결과에 암세포가 줄어들었다는 의사의 진단은 가족들에게 어렴풋하게나마 기대감을 주었고, 아버지에게서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이진 않았다. 아버지의 하얀 머리칼은 다 빠지고 다시 돋아나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받는 항암치료를 갈수록 버티기 힘들어 하셨다. 거의 1년 치료를 받았을 무렵이었는데 너무 힘들어하신 나머지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실 것 같았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상의를 한 후 우선은 항암치료를 쉬기로 했다. 일단 어느 정도 몸을 만든 후에 다시 항암치료를 받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그런데 의사와의 면담에서 아버지께서 맘을 바꾸셨다. 새로나온 약이 있는데 그것을 써보자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고, 아버지의 삶에 대한 욕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결국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다시 받기로 했다.
아버지는 치료를 잘 참아내셨다. 주말이 되어 퇴원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난 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뭔가 아버지가 드시고 싶은 음식을 사드리려 의양을 물었다. 아버지는 그때 잔치국수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따로 잔치국수집를 아는 곳이 없었고, 재래시장으로 가자니 이제 막 항암치료를 마치고 기력이 없는 아버지를 모시고 가기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리였다. 그래서 음식점이 많은 소위 먹자골목으로 통하는 거리로 차를 몰았다.
잔치국수집은 쉽게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칼국수집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점심시간도 지난 때라 아버지는 칼국수도 괜찮다고 하셔서 그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진 칼국수를 잘 드셨다. 함께 주문한 보쌈고기도 맛있게 드셨다. 다만 너무 기력이 없어보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자꾸만 음식을 흘리기도 했다. 주문한 음식을 다 드시고 나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께 대접해드린 마지막 음식이었다는 것을.
집에 돌아와 누우신 아버지를 확인하고 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아버지의 상태가 안좋아졌다. 마침 집에 들른 형에 의해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 또한 피곤한 병원생활이 다시 시작되었고, 형과 동생 드리고 나 또한 주말이면 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아버진 연일 진통제 처방과 수혈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선 마지막으로 받았던 항암치료가 부작용을 일으킨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더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못알렸던 친척들에게 아버지의 상태를 알렸다. 한 분 두 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려 친지분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결국 아버진 병원에서 진통제와 가래와 고통속에서 헤매이다 숨을 거두셨다. 공교롭게도 자식들은 생업으로 복귀하고 있을 때 어머니 혼자 임종을 지키셨다.
아버지 상을 치루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 함께 있던 친구가 출출하다고 뭣좀 먹고가자했다. 마침 보이는 곳이 새로 생긴 듯한 깔끔한 분위기의 잔치국수집이었다. 잔치국수를 보니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드시고 싶어했던 잔치국수. 보쌈수육도 칼국수도 맛있게 잘 드셨긴 했지만 결국은 사드리지 못한 음식이 잔치국수다.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이렇게 술마신 뒤 출출한 허기를 채우는 비싸지도 않은 이런 국수를 아버진 왜 그때 드시고 싶어했을까. 그날따라 왜 잔치국수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버진 언제 어떻게 돌아가실지 당신도 몰랐기에, 아버지의 기뻤던 기억이 담겨있는 형의 결혼식날의 맛있었던 그 잔치국수를 기억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 맛을 다시 보고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잔치국수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음식이다. 요즘은 곧잘 잔치국수 전문점이 눈에 띈다. 나로선 아버지의 마지막 원이었던 음식을 대접 못해드려서 아쉬운, 그래서 섭섭한 음식이 되어버렸다. 전에도 잘 찾은 음식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전과 다를 바 없이 먼저 찾는 음식은 아니다. 또 아버지도 그러하셨겠지만 형의 결혼식 때 먹었던 그 잔치국수만큼 맛있는 국수를 난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행복했던 시간의 즐거운 기억의 맛을 또 어디가서 맛볼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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