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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박물관

서경축구화를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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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트는 2003년 9월 딴지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을 옮긴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서울 변두리의 초등학교(
아직.. 이 초등학교란 말은 어색하기만 합니다만)에는 축구부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등교를 할 때면 축구부원들이 이미 운동장에서 줄맞추어 열라 뛰고 있었고, 하교후에도 축구부원 아이들은 운동장에 남아 공을 차고 연습을 하고는 했습니다. 한 마디로 늘 뺑이 치고 있었죠.

무슨 큰 대회라도 있는 기간이면 축구부원 아이들은 수업도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공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럴 땐 담임 선생님이나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나 축구부니까 그러려니.. 당연하게 생각하고는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모.. 학교를 대표해서 시합에 나가는 거니까요. 그냥 수업 땡까는 게 부러웠을 겝니다. 모 아무 거라도 학교 대표로 나서본 적이 없는 저로선 모..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 시절 축구부를 비록하여 갖은 운동부 아이들은 교내 캡짱은 다 먹고 다니던 때였습니다. 어쩌다 좀 모자란 녀석이 있어 엄한 애한테 맞았다가는 곧 축구부 주장이나 그런 애한테 혼나고는 때린 엄한 놈을 잡아다가 복수의 몰매, 처절한 응징을 당하는 그런 일도 생기고는 했죠. 그래서 부원아이들이 짖궂은 짓을 하거나 놀림을 해도 그냥 넘어가기가 일쑤였습니다. 또 각 반의 짱들은 축구부가 장악을 하고 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아마도 첫째 이유는 그런 조직스러운 파워의 테두리 안에 자신의 거취를 두고 싶었던 이유였을 것이고(
그럼 건드리는 놈들이 없겠죠...), 두째 이유는 간혹 아니 자주 수업을 공식적인 이유로 땡깔 수 있다는 더할 수 없이 신나는 기회를 누릴 수 있다는 이유일 테지요. 물론 아마도라고 얘기했듯이 축구부원이 아니었던 제 생각입니다만... 실제 부원 생활을 했던 아이들에겐 나름대로의 고충과 고민, 갈등, 역경, 시련, 극복, 폭행, 화해, 이탈, 복귀, 외상, 기합, 쎄쎄쎄... 기타등등 기타등등 여러 가지 인생사가 있었겠지요. 쎄쎄쎄는 아닌가?

아무튼 몇몇 아니 많은 수의 아이들에겐 축구부가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그것과는 아무런 별 상관없이 축구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축구부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축구화를 신고 다니던 그런 때였는데요... 아마 그무렵이 그무렵이지요. 모르긴 해도 여자 아이들도 신고 싶어했을 겁니다. 아 물론 여자아이들의 꿈은 빨간구두 아가씨의 그 빨간구두거나 신지도 못할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였겠지요. 아님 마시구요... 흠흠.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따라 시장엘 가면 신발가게 앞에서 철퍼덕 앉아 졸라대고는 했습니다. 엄마 축구화 사조사조~ 그러면서... 그럼 엄마는 니가 무슨 축구부도 아닌데 축구화를 신냐고 꾸짖죠. 그럼 아이는 우리 반 말똥이도 축구부 아닌데 신고 다닌단 말야... 그러면서 엄마를 설득합니다. 그럼 엄마는 담달에 아빠 월급타면 그때 사주께... 하면서 당장은 안 되지만 다음의 머지않은 날을 기약하자며 회유책을 씁니다. 다음 달엔 머 엄마는 거짓말장이 되는 거죠. 그럼 아이는요?

그렇죠, 뽀리를 깝니다. ^^; .. 죄송합니다. 이런 적절치 못한 용어를 사용하다니.. 쌔빈다는 얘기죠. 아! 네? 거듭 죄송.. 훔친다는 얘깁니다. 그치만 일부 도덕성이 결여된 아이들이 그랬죠.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애들 중엔 그 뽀리깐 여유분을 싼 값에 구매하는 아이들도 있었죠. 그도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열라 조르다 보면 엄마는 언젠가는 (
우리 다시 만나리이.. 아 이런.. 시도 때도 없이 노래가 나오다니..) 사주시고는 했죠.

당시 아이들의 축구화는 그져 까만 합성수지 갑피에 돌기가 달린 살색 밑창의 축구화였는데 조금 비싼 것은 금속 징이 박혀 보도 블록을 걸을 때면 자그닥자그닥 소리가 났습니다. 그걸 가진 아이들은 일부러 소리를 내고 다녔죠. 그럼 다른 아이들은 몹시도 부러워하면서 징이 없는 자신의 축구화를 원망했습니다. 조금 창의적인 아이들은 직접 징을 박기도 했습니다. 아무튼지 이런 축구화라도 공을 찰 땐면 뻥뻥뻥 똥볼 하난 기가 막히게 날렸습니다.

하지만 역시 축구화의 왕은 제목에 보셨듯이 바로 '서경' 축구화죠.

검은 쎄무가죽에 초록색 줄무늬가 날렵하게 재봉질된 선수용 수제 축구화였습니다. 이것은 축구부 아이들이 아니면 가지기가 힘들었죠. 게다가 값도 비싼 데다가 아무 데서나 팔지도 않았답니다.

큰거리 체육사엘 가거나 거기 없으면 시내 운동구점, 동대문운동장의 본점에나 가야 살 수가 있었죠. 어뜬 아이들은 그 어린 나이에 동대문운동장 본점에서 직접 방문하여 사왔다고 자랑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지방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내에 큰 체육사에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축구화를 사려고 돼지저금통을 잡은 녀석도 더러 있었습니다.

서경축구화는 축구화를 갖고 싶어하는 모든 아이들의 꿈이었습니다. 모르는 아이들도 금방 소문이나 들리는 말에 혹해서 큰거리 체육사 진열장에 있는 그 야성적인 자태를 보고나면 모두가 탐을 내지 않을 수 없었지요. 검은 쎄무가죽 표면이 주는 그 거친 질감과 마치 평원을 세차게 달리는 표범의 앞다리를 연상케 하는 두 줄무늬... 정말이지 그 멋드러진 첫인상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축구부를 들고 싶어하거나 축구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저로서도 그 서경 축구화를 신으면 당장에 운동장에 있는 축구부 애들 사이로 공을 몰고 휘휘 젖고 다닐 것 같았습니다.

서경축구화는 평양이 고향인 지금은 작고하신 노종영翁에 의해 1930 년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경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때 평양의 명칭이 서경이었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이후 종로 관수동에서 자리하다가 현재의 동대문운동장쪽으로 이전한 것은 70 년대부터라고 합니다.

서경축구화는 한국축구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인 1936 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축구선수단에 유일한 한국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바로 한국축구계의 원로인 김용식翁이 그 분인데, 이 분은 후에 1948 년 런던올림픽에는 한국 축구선수단의 주장으로, 그리고 한국대표팀 코치와 감독으로 최정민, 함흥철, 이회택, 김호 등 축구계의 역군들을 길러낸 한국축구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많으신 분입니다. 물론 이미 작고하신 어른입니다.

이 어르신이 그 베를린 올림픽 때 신고 공을 차며 뛰었던 축구화가 바로 서경축구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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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축구협회와 동대문운동장의 <서경스프츠> 매장에서 각각 한족씩 소장하고 있는 위의 축구화는 환갑이 이미 넘었군요. 참 튼튼하게도 생기셨습니다.

이후로도 수제 축구화의 명성을 쭈욱 지켜나갔던 서경축구화는 지금은 거의 온데간데 없어진 것 같습니다.

80 년대로 들어서면서 많은 외국의 메이커들이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아디다스니 나이키니 하는 유명 브랜드가 들어오고 국내에도 프로스펙스 같은 고급브랜드가 생기면서 점점 서경축구화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었습니다.

이윽고 더 이상은 검은 쎄무가죽의 서경축구화는 볼 수가 없게 되었고, 현재는 어쩌면 잘나가는 조기축구회 아저씨들도 잘 안 신을 것 같은 저가형 축구화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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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혀를 깨물며 애국을 외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렇게 소중한 역사와 장인정신이 깃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만 생길 뿐입니다.

세계화와 개방의 압력으로 바깥에선 한 시민운동가가 열사가 되어 죽어나갔지만, 안에서는 너나 할 것없는 회색 자본들은 고급외제차를 수입하며, 들여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갑니다.

고도의 자본논리에선 결국 선택되어지는 것들만이 살아 남겠지만, 양질의 품질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하여 알게 모르게 사라져간 것들에 대해 그져 아쉬워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쩌다 우울한 얘기로 이어지게 되었는데요.. 우리들에게 사라져간 브랜드는 서경축구화에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국산 브랜드는 프로스펙스, 르카프, 액티브, 월드컵, 키카 등이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서 많은 다수의 외래 브랜드에 힘겹게 맞서고 있지만, 그동안 명멸해간 많은 브랜드들이 있었습니다.

말표 태화고무의 '까발로(cavallo)' .. 이태리어로 '말' 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네요. 한자 힘력(力)자를 형상화했었다는 심벌이었습니다. 이 신발을 신고 다녔던 아이들은 난데없는 수난을 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죠. 마구 발로 까이고... 신발 이름 때문에.. 까발로->까! 발로...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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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이너가 바빠서 본 기자가 직접 볼펜으루다가 그렸습니다. 이해 바람다.

프로스펙스의 마이너 브랜드라 할 수 있던 왕자표 국제상사의 '스펙스(specs)' 라는 브랜드가 있었구요. 역시 국제상사의 것으로 이미 아동브랜드로 자리잡은 '아티스(arthis)' 도 있습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아트란 바로 이것이다(art this)" 의 합성어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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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수퍼카미트' 로 업그레이드 되는 사자표 대양고무의 '카미트(comet)' 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혜성같이 등장했으나, 혜성같이 업그레이드.. 혜성같이 중저가 브랜드로 자리잡드니...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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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에 아주 조악합니다만.. 이해를 돕기위해서... 참아주세요.. ^^;

사자표가 있으니 호랑이표, 범표가 없을리 없겠죠. 범표 삼화고무의 '타이거(tiger)' 란 명작이 한 때 인기를 끌었습니다. 운동화의 뒤축까지 끈을 연결해서 타이트하게 조여주는 착용감을 장점으로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했죠. 파란 원단에 노란 심벌로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라로 시각적인 멋도 추구했습니다.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선지 일본의 브랜드 '아식스타이거(asics tiger)'는 자국내에선 타이거란 브랜드네임으로 우리나라에선 아식스란 브랜드 네임으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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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에 대한 한없는 동경을 49 % 충족시켜줬던 '페가수스(pegasus)' 라는 짝퉁브랜드도 한창을 인기 끌었습니다. 테니스화 형태의 신발이 장수를 했습죠. 쫌 기장이 긴 교복바지를 입으면 가려지는 상단 무늬 때문에 멀리서 얼핏 보면 영락없는 나이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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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후의 짝퉁 명작 페가수스

현재는 아동화 브랜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기차표 동양고무의 '월드컵(worldcup)'은 한 때 '새니타이즈드(sanitized)' 항균효과를 이용하여 아이들의 발건강을 염려하는 학부모들에게 상당한 어필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후에 '프로월드컵(pro-worldcup)' 이란 업그레이드 브랜드가 생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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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계열인 SS 패션의 캐주얼 브랜드인 '위크엔드(weekend)' 에서도 한 때 운동화가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알파벳 'W' 를 갈매기 모양처럼 형상화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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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의류업체로 현재 마라톤화에 주력 국가대표들에게 줄기차게 대주고 있는 코오롱의 액티브는 처음엔 코오롱의 영문이니셜인 'K' 자를 형상화한 심벌로 발표했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자 언능 바꿨던 걸로 기억됩니다. 땡그란 것은 아마도 공(ball)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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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산 브랜드로 건재하고 있는 '르카프(Le CAF)' 도 초기엔 그져 '카프(CAF)' 로만 불렸었죠. 신발 뒤축에서 뻗어나오거나 신발 하단과 상단을 이어주는 다른 심벌과는 다르게 신발 아랫 부분에서 솟아오르다 마는 심벌과 감각적인 신발 디자인으로 참신함을 주었지만 보통의 아이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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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국산브랜드를 중심으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한 가지의 기억코드라고 할 수 있는 신발메이커를 살펴봤습니다. 굳이 뒤진다면 국내에 왔다가 물러난 외래 브랜드들도 여럿 존재하지만 나머지는 그저 여러분들의 기억에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국내에만 없다 뿐이지 지들 나라에선 여전히 잘 살고 있으니깐요. 그냥 심심하고 따분할 때라면 하나씩 떠올려보는 것도 자꾸만 떨어지는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램이 있다면 이것들의 사라짐을 단지 과거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길 것이 아니라, 브랜드 메이커에서는 뼈아픈 기억으로 각인하여 보다 전략적이고 세련된 마케팅과 품질향상에 힘써 국제적인 브랜드로 거듭나기를 당부해 봅니다. 또한 브랜드 자체가 크게 어필을 못한 까닭도 있겠지만, 소비자인 우리들도 조금이라도 국산 브랜드에 관심을 기울여 조언과 채찍질을 아끼지 말고 해주어야 하는데... 쩝, 별 게 있겠습니까.. 좋은 거 나오면 잘 사주는 수 밖에요...

그렇다고 모 억지루는 살 필요 없겠습니다. 맘에 들면 사야죠. ^^;

에.. 갑자기 이런 노래가 생각 나네요..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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