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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酒宙CLUB

[서소문] 놀부만두 오향족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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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만화책을 만드는 친구가 있는 나는 짬짬히 알바거리라도 하려고 녀석에게 기웃거리다 결국은 한 건을 얻어냈다. 그래 주저리주저리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무렵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나도 알고 있는 한 친구가 주변에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이리 오라 그러자해서 아직은 퇴근시간이 되지 않을 무렵, 얼결에 세 친구가 만났다. 나는 사실 점심 때도 한 친구를 만났으니 하루만에 친구를 세 명이나 만나는 셈이다.

배재빌딩 앞 화단에 앉아 담배를 피다가는 뭐하냐 술이라도 마시자 해서 약속이 있는 한 친구는 그냥 회사로 들어가고 나머지 두 놈은 남은 오후를 째기로 했다. 첨엔 광장시장이나 가서 빈대떡이나 먹을 요량이었지만 조금이지만 멀리 차타고 나가기도 귀찮고, 지금쯤이면 자리가 있겠다싶어 서소문 놀부만두집이나 가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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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집은 여전히 사람으로 붐볐다. 가격은 지난 번에 다녀갔을 적보다 5천원씩은 오른 듯 보였다. 둘이니 중자를 시키고 천천히 소주를 붓기 시작했다. 마침 비도 쏟아졌다. 마음이 울적해서 길을 나선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만나서 술을 마시고 쏟아지는 비를 보자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아... 빌어먹을... 술푼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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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오랫동안 회사와 싸웠다. 상사와 싸우고 체제와 싸우기도 했다. 놈은 신념이 강하고 호불호가 분명했다.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혹은 소주에 물탄듯이 살아가는 나로서는 녀석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지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설같은 말만 하는지라 나는 놈이 쏟아내는 자서전같은 이야기에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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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파란만장한 회사생활 이야기를 듣자니 내가 좀 초라하게 생각이 들었다. 큰기업도 아닌 중기업도 아닌 그렇다고 소기업은 될려나 한 개인회사나 다니다가 인터넷 물 좀 먹은 덕에 이리저리 짧은 글재주로 벌어먹고 살아온 나는 녀석처럼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로만 어쩐다 저쩐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만 현혹적인 이야기로 자신을 추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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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소스가 무슨 동치미 국물인줄 알았는지 훌쩍 입에 들이 붓다가는 '에구구' 한다. 어쩌면 정신이 번쩍했을지도 모른다. 난 깔깔대진 않았어도 푸하하고 한 번 웃어준 후 채썬 양배추를 소스 그릇에 덜어주었다. 소스의 신산한 맛이 양배추와 버무려져 짭조롬한 향이 나는 족발과 함께 입에 넣으면 그 묘하게 중화된 맛은 다시 이곳을 찾는 발걸음의 밑거름이 된다. 그래서 너무 술에 취하면 안된다. 맛을 못느낄 정도로 술에 취하고 나면 족발을 양배추에 먹었는지, 만두를 쌈에 싸서 먹었는지,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면, 굳이 줄서서 여기서 먹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냥 한가한 식당에 가서 그 흔한 삼겹살에 소주나 진탕 마시는 거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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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는 1인당 두개씩만 주는지 4개가 나왔다. 우린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두 개씩 덜어먹었다. 만둣국은 끓일 수 록 걸죽해지고 감칠맛 났다. 비록 오천원이나 올랐지만 이렇게 먹는 것도 나름 푸짐한 주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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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둣국을 안주로 몇잔을 나시고 나니 족발이 도착했다. 역시 깔아놓은 모양은 대자가 근사해보인다. 뭐 그렇다고 둘이서 대자를 주문하기는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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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드라지게 윤기가 흐르는 족발의 껍질처럼 친구와 내 인생도 저렇게 반질거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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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친구는 족발을 잘 안먹는다고 했다. 근데 내가 가자니깐 그래 친구가 가자는데 못갈 곳이 어디겠냐 그러면서 사실은 반 정도는 억지로 온 것이다. 근데 녀석은 배가 고팠는지... 살코기는 퍽퍽허다고 껍질덩어리를 한입에 덥썩 물고 씹어대는 것이었다. 냐... 너 잘 먹네... 그러면서 왜 뺐어...라고 물으니 점심도 안먹었단다. 그렇지... 시장이 반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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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딱 일인 일병씩만 하자고 했다. 사실 말로 그보다야 더 마실 줄 아는 주량이지만, 비도 오고 어쩌다 힘들게 자리 잡았는데, 이 짭조롬한 맛과 진한 향내를 잊어먹고 가기는 싫었다. 자주 올 것도 아니고 자주온다고 자리가 쉽게 생기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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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코기는 살코기대로 껍질은 껍질대로 맛이 있다. 친구말대로 조금은 퍼석하지만 사실 다른 족발집에 비하면 많이 부드럽다. 살짝 소스에 찍어 양배추와 같이 먹으면 그 퍼석한 맛도 물러지고 수월하게 목구멍에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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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족발의 맛은 껍질에 있다. 그 달달하고 짭조롬한 맛은 이 물컹하고 탱탱한 껍질에 다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짠 듯 싶지만 아무것도 찍지 않고 그냥 온채로 껍질만 먹는 것을 난 좋아한다. 다소 질겅거리면서도 고소한 기름기의 맛은 담백한 살코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껍질만이 줄 수 있는 맛이다. 아마도 그건 내 생각에는 몸에서 당기는 맛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기맛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라면 돼지껍질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이야기다. 또 어린 입맛에 질겅거리고 느끼한 껍질보다는 퍽퍽하지만 담백한 맛을 주는 살코기가 좋았다. 그러다 어느덧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가면서 껍질이 먹히기 시작했다. 달달하고 기름진 것이 입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건 팍팍한 내 인생살이에서 먹는 것에서나마 보충하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갈구하는 본능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이뻐지고 싶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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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나온 뒤 친구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무언가를 쏟아내 맘이 편해진 것인지, 내일이면 또 다시 돌아갈 회사일에 대한 막막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녀석이 바라는 모든 바가 한치의 모자람이 없이 죄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조금은 부족해도 좋으니까 인생이 좀 오향족발 껍질처럼 부들부들하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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